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의 1차 핵실험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일자를 보면 알겠지만 2006년은 [[노무현]]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[[참여정부]] 시기다.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한 5년 동안은 남북화해 분위기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, '''절대 아니었다.''' 막대한 대북지원을 했으나 이명박 - 박근혜 정권 9년처럼 살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, 노무현 정권 초반에 했던 김대중 정권 때의 불법 대북송금 사건을 수사한 일로 거의 남북관계가 냉랭했었다. 그 이후로는 조금 조용해졌나 싶더니 2006년 7월 초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같은 해 10월 9일에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금 남북관계가 냉랭해졌다. 핵실험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전과 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고, [[국민의 정부]]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[[햇볕정책]]은 효력이 다했으며,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인해 포용정책만을 고집하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. 북한의 1차 핵실험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지 딱 1년 뒤인 2007년 10월, [[2007 남북정상회담|남(노무현), 북(김정일)이 만나서]] 대남도발과 핵위협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였으나, 국내에선 노무현 정부 심판론이 대세였고, 더군다나 남북정상회담이 정권 말기에 열렸기 때문에 10.4 남북 공동 선언의 연속성이 위태로웠다. 결정적으로 북한의 1차 핵실험은 대한민국의 [[제17대 대통령 선거]]의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.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[[박근혜]]는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자신의 대권행보에 제동이 걸리게 되며 지지세도 빠지게 된다. 반면 후발 대선 주자였던 [[이명박]]의 지지세는 북한의 1차 핵실험을 계기로 박근혜를 앞서가기 시작했으며, 이러한 상황을 제17대 대선후보 경선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된다. 물론 박근혜에게 대선 경선 패배의 결정타를 날린 것은 [[2007년 재보궐선거]]였지만, 그 발단은 바로 북한의 1차 핵실험이었다. 결국 정권이 교체되어 대북 강경파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선 비핵화 주장과 북한의 연속된 도발로 인해 다시 남북관계는 얼음장으로 변했다. 북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3년 뒤인 2009년 5월 25일, 그러니까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이틀 뒤에 핵실험을 감행한다.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북한의 명백한 상중 고인모욕이다. 대한민국이 노 전 대통령 추모 분위기인 와중 갑자기 핵실험을 강행했기 때문이다.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대 진영이었던 보수 정당들도 적어도 상 기간 동안은 고인을 추모하는 예를 갖추었는데 북한은 [[북한의 2차 핵실험|그런 거 없다]]를 시전하여 싸늘하게 만들었다. 또한 북한의 1차 핵실험 당시 [[발트 3국]] 중 하나인 [[에스토니아]]가 북한의 국가승인을 취소했다고 알려져 있다. 아이러니한 건 같은 발트 3국인 [[리투아니아]]와 [[라트비아]]는 현재도 북한과 수교 상태다.[* 사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는 1991년 9월에 한국보다도 먼저 북한과 수교를 맺은 반면(한국은 이후 10월) 에스토니아는 독립하자마자 바로 한국과 수교를 맺지만 북한과는 처음부터 수교를 맺지도 않았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